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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화백 기억의 소품을 벗다 제 2의 신윤복, 브레스(Breath) 아티스트 | |||
김영화 화백의 작품을 바라보면 아, 살고 싶어진다. 가슴팍에서 똬리를 튼 심장의 야시시한 꿈틀거림. 그것은 생의 충동에서 느껴지는 오르가즘이다. 왜 그를 두고서 골프회화작가라는 타이틀 이전에 브레스(Breath) 아티스트라고 하는지 알겠다. 보는 이에게 긍정의 희열을 전해준다면, 그것은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다. 숨을 쉰다는 말이다. 화가의 작품 속 덩어리째 표현되는 오방색의 물결은 여백을 남겨두고 흘러간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숨 한번 돌리라는 뜻으로 창(窓)을 선물한 걸까. 그러고 보니 재미나다. 동·서양미술이 이처럼 에로틱하게 잘 합궁돼 있다는 것에. 더욱이 현 시대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골프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관계와 감정곡선을 날카로우면서도 위트 넘치는 예술성으로 녹여냈다는 점이 탁월하다. 특히 예술과 스포츠의 결합을 역동적인 회화작품으로 탄생시킨 것. 그것은 파격이자 진보다.
# 짭조름한 기억의 소품 한 올 도봉 김윤태 명장은 이조다완을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인물로 유명했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흙의 냄새를 쫓아 살게 된 도자기의 메카 문경,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왔다. “김 선생님, 그거 다 주쇼” 그는 도봉의 작품 모두를 가져가 서울 인사동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사람은 서로 믿으라고 사람이제. 도봉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간의 작품을 전부 실어 보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났던가. 곧 연락을 준다던 사람은 함흥차사 소식이 없었다. 한 번 올라가 보이소.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상경했던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작품을 일본으로 가져가 골동품으로 속여 어마어마한 값을 받고 판 것이었다. 일순간 모든 작품을 잃은 도봉의 가산은 일거에 기울고 말았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몰랐던 예천 임씨인 어머니는 그날로 산에 올라가 쑥이며 온갖 나물을 캐었다. 그것을 시장에 나가 파는 것은 김 화백에게 맡겨졌다. 당장 끼니 때울 일이 문제인데 도봉은 앉아서 가마에 불만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 벌어 올 터이니 동생들 잘 돌보고 있으라. 그 길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자기 공장이 있는 먼 곳으로 떠났다. 중학교에 올라가지 못한 아이는 푸념 없이 살림을 맡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남의 집 일을 하였다. 조그만 손으로 시린 냇가에서 빨래를 할 때면 이렇게 퉁퉁 불다가 종국에는 빨간 석류 알처럼 알알이 터져 피가 솟구칠거야... 속으로 오줌을 지렸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아이의 손에는 소고기와 빵이 들려있었다. 영화야...그날은 추석이었고 먼 발치에 계신 분은 어머니였다. 오랜만에 둘러앉아 어렵사리 쪄낸 송편을 먹는데 윽! 순간 돌이 씹혔다. 뱉는 것이 아까워 애써 밀어 넣는데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더니 코끝이 찡해지며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쉬이 가시지가 않았다. 그래...그래...다 알아...등을 토닥여주던 어머니의 어깨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의 짭조름한 물기는 지금도 오방색의 물결과 함께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필력이 있는 이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 풍경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데, 자네 딸 영화의 그림이 꼭 그렇단 말이야.” 딸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예술을 하는 지기들이었다. 그 뒤로 아버지 친구였던 청초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다. 동네에서 수재소리를 들었던 것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때의 서러움과 갈망 때문이었을 게다. 덕분에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미술입시였지만 어렵지 않게 홍익대 미술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과제 전(展)을 내오라고 하셨다. 김영화 화백이 그린 것은 커다란 핏빛 심장, 맨드라미 한 송이였다. 그 안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숨어 있었다. 긴 나날, 짝사랑했던 임은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그만 부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고백 한 번 못해본 사랑은 속으로만 영글어 검붉은 피가 괴는 듯했다. 이룰 수 없다면 비우자. 캔버스 위로 심장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작품 ‘불타는 사랑’을 보신 교수님은 커다란 맨드라미를 가리키며 왜 이렇게 그렸냐며 꾸짖으셨다. “그렇게 그리고 싶어서 그렸습니다”라고 답하자, 교수님은 이후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과대한테서 연락이 왔다. 김영화. 얼른 낙관가지고 와.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제일 좋은 그림을 그려놓고서는 왜 낙관도 안 찍었냐”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며 과제 전(展)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이제서 하는 얘기지만, 85년도에 만난 남편과는 동거부터 시작했다. 부모님은 지금도 모르고 계신다. 당신 집에서 살게 해줘. 그 당시 그이는 뼈대 있는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식구 네 명이 한 방에 살았을 만큼이나 가난했다. 그래, 그럼. 대신 내가 작업할 때는 방해하지 말아줘. 그렇게 시작된 동거였다. 숙명이라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감히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남편과의 인연이 그랬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유학을 가야지 했는데, 정작 현실은 장학금을 탄 돈을 가지고 대학생인 그이를 위한 학비로 충당하고 있었다. 저희 결혼할게요. 아버지는 묵묵히 들으시더니 “난 자네를 보고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내 딸을 믿기 때문에 허락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학교를 졸업한 남편에게는 은행 직을 추천했다. 살림은 차츰 안정되어갔으나 남편과는 사고의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 대학원이 가고 싶으면 당신이 직접 벌어서 다녀. 아이들까지 있으면서 무슨 해외를 간다는 거야? 시간강사만 하면 뭐해? 전임교수가 돼야지. 전시회를 연다고 다 성공하는 줄 아나? 골프를 한다고? 미친 거 아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그이에게서는 단 한 푼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럴수록 강해져갔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을 역발상으로 창작의 샘물에 쏟아 부었다. 첫 개인전의 타이틀이 ‘에로스와 생명성’이었던 것도 부부생활에서 오는 감정의 파편들을 농염한 에로티시즘으로 표출해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대의 감정을 가진 사람” 갈채와도 같은 호평이 쏟아졌다. 영화에도 등장하고 9시 뉴스에도 소개될 만큼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슬럼프는 ‘물’에서부터 왔다. 에모토 마사루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으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성산동에서의 대형 물난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거 봐. 하나도 안 팔린다고 했지? 남편의 외조 없는 냉소는 때로 는 살점을 후벼 파는 듯했다. “김영화씨인가요?”
건강상의 이유로 시작한 골프를 통해 파격적인 회화소재를 얻게 된 김 화백은 그린위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전쟁, 골프를 통해 보여 지는 현대인들의 특징을 부드러운 곡선과 여백,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며 풍자와 해학정신을 녹여내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시 25회(한국 일본 중국 등) 現 김영화미술연구소(www.kimart.net)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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